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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개혁군주인가 조선을 아작낸 천하의 개쌍늠인가!

by 조각몸매 이휴재 2024.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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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라는 명칭은 꽤 된다. 고려시대에도 고종이 있고 당 고종도 있었다.

여기서 거론하고자 하는 인물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고종이다. 어느나라나

어느시대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역사임물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는

왕이나 통치자들이 그러한 입장이었다. 최근 영화 <건국전쟁>을 통해 이승만

초대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그러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대한민국의 탄생으로 시작된 민주광화국의 실권자가 아닌 왕이

여호와였던 완정시대에도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아마도 고종이 그러한 ㅓㄴ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고종이라면 떠오르는 평가가 조선 멸망의 장본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아마도

가장 큰 실책 중에 하나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는 이유에서가 아닌사 싶다. 사실 그 조약의 책

임을 을사5적이라 불리는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재순, 권중현 등이라고 볼 수있기때문이다.

그 외중에 고종은 이 조약에 대해서 무효화시키기도 했지만 이미 체결된 뒤여서 효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고종은 선친 흥선대원군이 배척한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개화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로도 알려져있다.

 

1880년대부터 1910년까지 30년 동안 양장, 구두, 주택, 전신, 우편, 전화, 전등, 전기 배, 철도,

자동차, 비행기, 수도 등이 도입되거나 설치되면서 문명의 이기를 가져다주곤 했다. 그리고 동학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인 건 고종이 아닌 민비였다. 6.25때 한강교를 끊은 사람은

이승만의 직접 명령이 아닌 채병덕 육참총장의 독단적인 지시였듯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임오

군란의 발단이 된 모래섞인 쌀도 민비의 남매중 한 명인 신해철 당상 민겸호의 행태였기에 이 소

식을 들은 고종은 그를 파직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갑신정변때도 고종이 아닌 민비와 그 식솔들이 주 타깃이었던 것이다.  물론 앞서 처음에는

잘했으나 마무리를 실패한 지도자들을 주제로 집필한 대로 고종도 그러한 잣대를 들 수있는지도

모른다. 사실상 고종은 민비가 시해된 이후로는 그의 그늘에서 벗어난 듯 했지만 무리수를 두어 어

정쩡하게 국정을 다스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독립자금을 은닉하여 그의 아들

이강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행보는 왕위에서 퇴위당한 이후의

일이다.

 

1907년 정미 7조약에 이은 군대 해산으로 일제는 조선을 더욱 옥죄어 오자 이준 등 종친(!)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에 일본의 부당성을 폭로하려했지만 좌절된다. 결국 일본은 그 책임을 물어 고종을 권좌

에서 끌어냈고 이로써 43년의 긴 통치는 본의 아니게 막을 내린 셈이었다. 네덜란드에 있는 헤이그는

그래서 지명이 헤이그~가 아니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