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히어로 임영웅의 고장으로 사실상 성지가 된 포천은 6.25때만
해도 국토의 3분의 1이 38선 이북이었다. 지금은 대표적인 관광지가 된
산정호수는 원래 김일성의 별장이었다. 북한정부수립 이전 김두한과 별
동대의 습격을 받기도 한 그곳은 6.26고지전때 수복되어 대한민국의 영
토가 되었다. 포천은 시 승격 30년을 앞두고 그동안 광역시로 승격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대부분의 영토가 개발되었다. 단점이라면 경기도 내륙
지역으로는 유일하게 철도가 없다는 점이다.
이제 조만간 포천에도 철도가 생긴다. 기존의 7호선을 양주를 거쳐 포천
까지 연장하는 계획을 추진중이다. 이것만이 아니라도 포천에는 유서가
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그러면 포천의 역사와 지금의 이모저모에 대해
살펴본다.
포천시는 삼국시대 맨 처음에는 마한 및 백제에 속했다가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이후 고구려의 마홀군이었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견성군이
되었다. 고려 성종 때 포주군이 되었다. 그러다 조선 태종 13년
때 주(州)자를 가진 도호부 미만의 군·현 명칭의 끝글자를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하도록 지시해 포천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오늘에
이른다.[17]
한편, 구 영평군은 백제, 고구려 때 양골현이라고 하다가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동음현이라 고쳤다.고려 예종 때 비로소 감무를 두어
다스렸다. 원종 때 영흥현으로 승격하고 현령을 두었다. 조선 태조 때 태조의
고향인 동북면(함경도) 화령이 영흥으로 개칭되며 이름이 같아지자, 영평현이
되었으며 1906년 현재의 연천군 청산면 지역과 포천시 신북면 북서부 지역을
양주군에서 편입하였다.
1914년에 영평군이 포천군에 흡수되었다. 남북분단 이후 북부(옛 영평군의
대부분)가 38선 이북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면 경계의 조정이 있었다.
북측은 북반부를 영평군으로 개칭하여 관리하다가 1년만에 철원군에 합치게
되었으나, 6.25 전쟁으로 남측이 수복하여 38선 이북의 포천군을 북포천군으로
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이때 김화군 사내면을 편입하였다. 1954년 수복지구의
행정권이 회복되어 사내면을 화천군에 이관하고 면 경계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1979년 포천면이 포천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 연천군 관인면을 편입하
는 대신 삼정리, 갈월리, 금동리, 덕둔리를 제외한 청산면을 넘겨주었고, 해당 4
개 리는 신북면에 편입되었다. 1996년 2월 소흘면이 소흘읍으로 승격되었다.
2003년 10월 19일 포천군 전체가 도농복합시로 승격되면서 포천읍은 포천동과
선단동으로 분리되었다. 특이한 점은, 현 포천시 동 지역(포천동, 선단동)에 해당
되는 구 포천읍의 인구가 시 승격 기준인 5만 명이 되지 않았음에도 시로 승격되
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포천군이 지방자치법 제7조 2항 3호[19]에 해당되는 시 승격 대상
이었기 때문이다. 포천시는 구 포천읍의 인구가 5만 명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시
승격 당시 소흘읍 역시 상당한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으며 총 인구가 15만 명 이상
이었기 때문에(2003년 시 승격 당시 포천군 전체 150,240명, 포천읍 35,045명, 소
흘읍 31,718명), 위의 요건을 충족하여 시로 승격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구 포천
읍 지역이 3만대에서 정체 중인데 소흘읍이 5만을 넘어 인구수가 역전되었으니 격
세지감을 느낀다.
https://www.youtube.com/watch?v=JjKakIg9KW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