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슨 혜초스님이 예루살렘까지 갔다는 소리냐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우리나라가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도 해방직후 우리나라도 어느정도 살았었으나 전쟁으로 묵사발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판단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에 비해 부자나라였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완전히 분단되기 전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해방 후의 북한의 1인당 소득이 300불이던 반면에 남한은 100불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나마 원조받은 것까지 포함해 그정도였다는 것이다. 300불이면 남한의 1970년대 초반수준이다. 그런데 1960년대 통계에 의하면 200불대로 주저앉았는데 그 이유는 전쟁으로 인한 초토화와 전ㅂㅣ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당시 남한의 경제규모는 북한에 미치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에는 아시다시피 남북공동성명을 하던 무렵이기도 하다. 아울러 남측 지도부가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그곳의 풍경은 마치 마천루 같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도 드믈지만 삼일빌딩을 비롯하여 삼성본사, 정부청사 등 멋쟁이 높은 빌딩 으시대던 때였다. 그러나 이무렵부터 서서히 남북한 경제가 역전되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수도인 평양만 화려했을 뿐 지방도시나 농어촌 지역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따라서 초창기 북한경제는 당시의 대만을 앞섰다고 한다. 만약에 당시 남북한이 하나였으면 대만 뿐 아니라 싱가포르도 앞섰을지 모른다. 그것보다도 당시 국민들의 삶이었다. 현재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는 어르신들 중에는 흔히 조부나 대대로 대지주였지만 동란으로 풍비박산났다는 사연이 많다. 그중에는 전통문화라고 볼 만큼 뿌리깊게 이어져왔던 양반과 천민의 경계가 6.25때 전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때 공산군들이 양반지주들은 부르주아라며 몰살했는지 이후 양반들이 소멸되었다고 말한다. 나의 외조부와 친조부가 모두 대지주셨다고 한다. 외조부는 공산군에 잡혀 처형되셨다고 하셨고 친조부는 해방 전에 병사하셨다고 들었다. 그런데 부친께서는 슬하에 형제분이 있었다고 한다. 부친의 고향이 함북 청친으로 해방이 되기 전에 소련군이 점령하자 월남하셨다고 한다. 그때 땅문서와 집문서를 두고 왔으나 부친의 아우가 자유당의 전신이던 한민당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불과 한 달만에 전쟁이 발발하고 부친의 아우 또한 처형되엇다고 한다. 부친의 아우니까 나에게는 삼촌인 셈이다. 심지어는 허경경도 부친이 대지주였다고한다. 그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피를 뽑아 학비를 마련할 정도로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알고 잇었다. 그런데 그의 부친이 해방 후에 자신의 전답을 이웃 소작인들에게 분배하자 동료 지주들이 시기했는지 허경영의 부친을 사상범으로 몰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허경영의 부친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재산마저 몰수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과부가 된 허경영의 모친은 이듬해 중랑교 밑 움막에서 살면서 허경영을 낳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허경영을 출산한지 몇 년 만에 그의 모친도 영양실조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자 평소 허경영의 부친에게 혜택을 받았던 소작인들이 그를 데려가 알바(머슴)로 채용하고 훗날에는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의 양자가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생전에 허경영 부친의 후원을 받았다며 고아가 된 그를 안쓰러워했다는 설명이다. 정작 이병철 자신도 의령의 대지주 가문이었는데 그런 그를 후원할 정도라면 허경영의 부친의 재력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결말이 무엇인고 하면 사람은 처음부터 부자였고 가난한 사람은 없었다는 증거다. 따라서 부자였던 사람이 가난해질 수도 있고 가난했던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다는게 세상의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