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엳대대통령 가운데 젤루 장수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지미 카터는 미국의 39대 대통령으로, 그의 생애와 업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지미 카터의 생애, 정치 경력, 퇴임 후 활동,
그리고 그의 유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지미 카터는 1924년 10월 1일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카터는 조지아
공과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해군에서 복무한 후 가족의 농장을 운영하게 된다.
그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은 그가 나중에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걷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62년 조지아주 상원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되고, 이후 1970년에는
조지아 주지사로 선출된다. 주지사로서의 경험은 그가 197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정치 경력과 대통령 재임
1976년, 지미 카터는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승리하게 된다.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1977년부터 1981년까지로,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다.
특히, 카터는 인권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외교 정책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이란 혁명과 같은 국제적인 위기 속에서도 외교적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카터는
또한 에너지 위기와 경제 문제에 직면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재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 중 하나는 Camp David Accords로,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평화 협정을 중재한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주한미군 철수와 같은 논란도 있었고, 결국 1980년 대선에서
재선에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퇴임 후에 더 많은 빛을 발하게 된다. 그의 80세 생신을 전후하여
'가장 인기 없던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이라는 이니셜이 붙기도 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이기도 한 카터 전 대통령은 낙향 후 자신의 고향의 교회에서 주일
학교교사로 봉직하였다. 퇴임 후 다시금 외교일선에 나선 것은 그의 70세 생신을
맞던 1994년도였다.
당시 한반도는 핵전쟁 위기설까지 나돌 정도로 일측족발의 상황이었다. 그러던
카터 전 대통령의 중재로 다시금 대화의 물꼬를 틔우게 된다. 바로 남북정상회담
합의였는데 당시 김일성을 만나 그 유명한 대동강 뱃놀이를 통해 성사되었다.
하지만 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의 갑작스런 유고에 예정일은 다음정부로 넘어갔다.
그후 2002년 2차 북핵위기가 발생하면서 또다시 카터에 SOS를 보내기도 했으나
당시 카터는 베네수엘라 사태를 중재하기 위해 남미를 방문중이었다. 90대에는
암이 발병하기도 했으나 완쾌된 바있다. 얼마 전 징크스에 관해 포스팅했었는데
카터를 알현한 독재자들은 대부분 그해에 사망했다는 점이다. 이상으로 2024년도
티스토리 포스팅을 마친다.
https://www.youtube.com/watch?v=KfP6UuKsLmg